김혁일 시선 25

계곡의 아침


냇물은 벌써 깨어 두 눈 비비며

어머머 늦었어 이거 어쩌지

하며 부산인데


밤일이 과했는지

산은 아직도 깰 줄을 모르네


자오록한 안개는

누가 내린 나이트가운 한 벌

살포시 계곡을 감싸는데


어젯밤 수고한 사람 좀 더 자라고

아홉시가 넘도록

햇님은 나오시지 않네



古 木


中山공원에 가면 

나는 으레 옛성터의 고목을 배알한다


오로지 위로만 치솟은 南洋松과

버거우리만치 우람한 녹나무들


말이 없는 고목은

내가 본 적 없는 할아버지 같기도 하고

돌아가신 아버지 같기도 하다


고목 아래 서면

거리의 소음은 잠시 잠잠해 진다

간사한 세상의 간사한 소리들이

꼬리를 내린다


간간히 어디선가

공자님의 거문고 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하고

고승의 독경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고목은

어디를 보아도 모자라는 데가 없어 보인다

부러진 가지조차

자연의 섭리인 것같다


고목을 보는 일은 목이 아픈 일이지만

고목을 보면 하늘이 보인다



海南島 인상

 

1


해남도 어디를 가든

기별 안 해도

야자나무는 일찌감치 나와 기다려준다

옛친구처럼

멀리서부터 손짓해준다


2


섬사람들은 옷보다 바람을 더 많이 입는다

그 중 최고의 패션은

건들건들한 저녁바람이다


3


햇님은 가장 이쁜 딸을 해남도로 보냈다고 한다

그 찬란한 따님들 중에서도 가장 찬란한 따님을


그래선가

해남도엔 여우비가 흔하다


아가씨야

넌 눈물을 쏟아도 찬란한 걸


4


해남도의 구름은 이세상 피부가 가장 흰 아낙네다

젖가슴이 가장 풍성한 아낙네다


이 솜장수 아낙네는

가끔 내가 사는 골목길까지 찾아들어온다


5


해남도는 별과 가장 가까운 동네다

밤이면 굴직굴직한 것들이 지붕이며 나무가지 위에 널려있다


북쪽에서 내려온 키 큰 총각이면

어렵잖게 한 두개 딸 수 있으리라


6


섬은 파도소리에 깨고

파도소리에 잠든다


쏴-- 쏴-- 쏴--


섬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바다는 두고 두고 나그네의 잔등을 두드리며 넉두리할가


퍼더덕 퍽, 퍼더덕 퍽--


그러나 알고 보면

그들은 정말 다정한 커플이기도 하다


바람이 자는 날은

그들의 달콤한 속삭임이 면면이 이어진다


촐라닥 촐촐-- 촐라닥 촐촐--


그러나 그 다정함은

노도와 암반의 격돌로 치달으는 경우도 있다

태풍이 올 때다


우르릉-- 쿵! 쾅!   우르릉-- 쿵! 쾅!




해변일기 2 


당신 앞에 서면

나는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한다고 더듬거릴 수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바다입니다

내가 당신을 가진다는 것은

강이 바다를 가진다는 말일 것입니다


당신은 날 산이라 부르지만

나는 당신의 작은 섬에 불과합니다


내가 어찌 당신을 정복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저 당신에게 깊이깊이 빠질 뿐입니다


그러나 당신을 사랑한다고 감히 말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나를 거인으로 만듭니다


바다보다 큰 땅은 없다지만

바다보다 큰 남자의 사랑은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큰 바다도 해안선이 있는 법입니다

그것이 남자의 팔뚝이고

그것이 남자의 가슴입니다


당신 앞에 서면

나는 욕심이 너무 많은 아이가 됩니다

당신을 이 세상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고 싶어집니다




바닷사람


바다로 나간 사람들은

못 돌아오는 수도 있다

그러나

돌아온 사람들은

다시 바다로 나간다

거북이가 뭍에 올라와 알 쓸고 다시 바다로 나가 듯

남정들은 뭍에다 아이들과 아낙네들을 두고

바다로 나간다

뭍은 그들의 생식지고

바다는 그들의 서식지다

바닷사람들은 바다를 딛고 산다

파도를 깔고 산다

바다는 그들의 땅이고

바다는 그들의 밭이다

파도가 떠밀어도

뭍은 등을 돌리지 않는다

바람이 꺾어도

나무는 뭍을 떠나지 않는다

태풍이 지나가면

쓰러졌던 풀들은 머리를 쳐들고

바닷사람들은

다시 바다로 나간다



조각달

 

날 두고 잘도 가더니

가면 다시 안 올 것 같더니


보름도 못 가서

뭐하러 돌아왔느냐


오면 온다고 전갈이나 할거지

오면서 온다고 말도 않고


반쪽이 된 얼굴

몰골이 뭐냐


왔으면 왔노라

탕탕 문이나 두드려 줄거지


무슨 한이 맺혔길래 이 밤이 다하도록

하얗게 째려만 보느냐, 웬쑤야




순이의  


긴 줄 서 작은 표 한 장 끊어

먼 길 떠난다

남쪽으로 내려온 순이는

올해도 이 일을 반복한다

올해도 집사람들 앞에 내놓을 돈 봉투는

서리 맞은 낙엽 한 장 처럼

초라하다

"무슨 짓으로 돈을 벌까"

철이 좀 들면서 지금까지

하루도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난 적 없다

그러나

순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돈이 되지 않았다

성실과 근면과 야근 수당을 다 합쳐도

분이가 입는 야한 드레스 한벌 값도 안된다

잘 씻어 곱게 포갠

하얀 손수건 하나

물걸레처럼 막 쓸 수 없는 작은 손수건 하나

순이의 손에는

그 얇은 손수건 하나가 꼭 쥐여져 있다

분이는 차 샀다더라

옥이는 도시에 집사고 엄마 모셔갔다더라

고향 가면 이런 소리 들을 때가

순이는 제일 힘들었다

내년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돈을 좀 벌어야 하는데…

설 전부터

고향 가기 전부터

순이는 그 생각으로 마음이 무겁다





대나무아가씨


대나무는 숫처녀인가 봅니다끼리끼리 모여 소근소근 잘도 속삭입니다그러다 맘에 두었던 총각이 나타나면부끄러워 얼굴을 싸쥐고온 몸을 가볍게 흔듭니다그렇게 잘 흔들리는 어깨지만잘 흔들리는 마음은 아닙니다몸매가 날씬한 아가씨는참으로 마음이 한결같이 바릅니다




農牛


농촌을 떠난 소는도시에서도 체력으로 산다밭을 갈지 않는 소는 이제 도시에서 빌딩을 심는다그러나 소에겐 쪽침대 놀 방 하나 없다배낭 하나가 있을 뿐이다소는 예나 지금이나 빈농이다부자들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부자들의 곡물이다슬퍼도소는 쉬이 울지 않는다힘들어도소는 쉬이 한숨을 짓지도 않는다별로 불만도 없다그저 가는 데 까지 가다가 쓰러질 뿐이다시골을 떠난 소는도시에서도 뿔을 쓰지 않는다체력으로만 산다젊어서 고향을 떠난 소는청춘과 기력을 도시에 쏟아붓고노쇠하고 쇠진하면다시 시골로 돌아간다고향엔 기운 쓸 땅도 없지만그래서 기운이 없으면고향으로 내려간다




엄마

 

엄마가 가신지 이미 2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가다가

문득 문득 나는

구들 아랫목에 앉으셔 점도록 날 쳐다보시는

엄마를 봅니다


엄마는 먼 곳으로 떠나는 아들

먼 곳에서 오는 아들

며칠만 있다가 떠날 아들을

늘 그런 눈길로 쳐다보셨습니다


이제 이 세상 누구도 그런 눈길로 나를 바라보지 않을 것입니다

19살 고향을 떠나면서 나는

나는 고향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애인이 있는 곳이 나의 고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흔이 지나서 나는

애인은 이세상에 없고

어머님만이 이 세상에 있음을 알았고

어머님이 계시는 곳이 나의 고향임을 알았습니다


엄마는 생전에 허기리를 제일 보고싶어 했어

라고 동네 어르신들은 저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허기리 오라고 할까요?

하고 누나가 물으니

엄마가 한참 대답이 없으시다 허시는 말씀이

허기리는 오지 말라고 해라  하시더랍니다


평생 북쪽 시골서 사신 엄마는

바다가 있는 남쪽이 까마득히 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까마득히 먼 곳에 가 있는 아들을 제일 아파했을 것입니다


너한테 해준 거 아무 것도 없는데

자꾸 받기만 해서... 내가 빨리 죽어야 너가 편하겠는데...

내가 부치는 단돈을 받을 때마다

엄마는 늘 이런 말씀이셨습니다

이 아들을 낳고 키우고 하루도 걱정 안 하는 날이 없고... 그러신 걸

전혀 생각 못하시나 봅니다

이세상의 하늘을 볼 수 있게 낳아준 것만으로도 하늘 같은 은혜인 걸

전혀 모르시나봅니다


엄마가 가신지 이미 2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가다가

문득 문득

나는 동구에 나와 날 기다리는 엄마를 봅니다

떠나는 나를 계속 따라 나오시는 엄마를 봅니다


엄마 내가 보고 싶지?

올해 겨울엔 엄마보러 고향에 한번 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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