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李朝)기초(基礎)의 완성(完成)
세조(世祖)의 다음에 예종(睿宗)은 위(位)에 있은지 일년(一年)이오 성종(成宗)이 왕(王)이되니 이때는 이조(李朝)의 기초(基礎)가 굳어지고 또 여러 가지 제도(制度)가 갖추어졌다. 왕(王)은 유신(儒臣) 김종직(金宗直) 등(等)을 쓰고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문선(東文選)같은 책(冊)을 만들고 또 세조(世祖)때에 시작(始作)하여 끝마치지 못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完成)하니 이는 이후(以後) 수백년(數百年)동안 정치(政治)를 행(行)하는 기틀이 되었다. 집현전(集賢殿)은 세조(世祖)때에 폐(廢)하였으나 성종(成宗)은 홍문관(弘文館)을 새로이 두고 젊은 학자(學者)들을 공부(工夫)시키던 호당(湖堂)도 다시 시작(始作)하였다.
사회(社會)의 계급(階級)에는 네 층(層)이 있어 그 지위(地位)가 직업(職業)과 사회적(社會的) 대우(待遇)를 달리 하였으며 대개(大槪)는 거주지역(居住地域)도 달리하고 또 다른 계급(階級)과 혼인(婚姻)하는 일도 적었다. 여러 계급(階級) 중(中)에 가장 상층(上層)에 있는 것이 양반(兩班)이니 양반(兩班)이라 함은 동반(東班)인 문관(文官)과 서반(西班)인 무관(武官)을 합(合)한 말이다. 공경(功卿)과 사대부(士大夫) 계급(階級)을 통틀어 말함이며 이들은 정치(政治)를 지도(指導)하는 지위(地位)를 차지하여 모든 특권(特權)과 향락(享樂)을 누리었다.
그 다음에 중인(中人) 계급(階級)이 있으니 그들은 의관(醫官) 역관(譯官) 계사(計士) 관상(觀相) 율학(律學) 사자(寫字) 도화(圖畵) 등(等) 국가(國家)에 요긴(要緊)한 기술(技術) 방면(方面)의 일을 맡아보았다. 사회적(社會的) 지위(地位)는 양반과 상민(常民)의 중간(中間)이었으며 이 밖에 이서(吏胥)와 군교(軍校) 같은 층(層)은 보다 얼마쯤 낮은 것이었으나 역시(亦是) 중인(中人) 계급(階級)에 속(屬)하였다. 그 다음에 상민계급(常民階級)은 농업(農業) 공업(工業) 상업(商業)에 종사(從事)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 수(數)가 가장 많고 또 국가경제(國家經濟)의 중심(中心)을 이루고 있으나 그 사회적(社會的) 지위(地位)가 낮아서 자기(自己)의 생존권(生存權)을 보전(保全)할 만한 힘을 가지지 못하고 양반(兩班)과 중인(中人)에게 눌리어 지냈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천민계급(賤民階級)은 노비(奴婢)를 비롯하여 배우(俳優) 무당(巫堂) 기생(妓生) 역졸(驛卒) 백정(白丁) 등(等)을 말하는 것이니 노비(奴婢)에는 국사(國事)에 속(屬)하는 것을 공노비(公奴婢)라하고 개인가(個人家)에 속(屬)하는 것은 사노비(私奴婢)라 하며 백정(白丁)에도 지금에 흔히 말하는 소 잡는 사람만이 백정(白丁)이 아니라 유기(柳器) 장피(匠皮) 혁공(革工) 같은 것도 모두 백정(白丁)이라 불렀고 이들은 인권(人權)을 주장(主張)하지 못함은 물론(勿論)이오 어떤 경우(境遇)에는 우마(牛馬)와 동양(同樣)의 대우(待遇)를 받았다.
외교관계(外交關係)에 있어서는 명(明)나라에 대(對)한 조공(朝貢)과 일본(日本) 남양(南陽) 등(等)에 대(對)한 교린(交隣)이 있었는데 이러한 외교(外交)의 이면(裏面)에는 인국(隣國)들과 평화(平和)로운 무역(貿易)을 행(行)하려는 것이 있었다. 명(明)나라와의 관계(關係)는 해마다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무역(朝貢貿易)을 행(行)하고 저쪽에서 사신(使臣)이 오면 이를 칙사(勅使)라 하여 특별(特別)히 대우(待遇)하였는데 조공무역(朝貢貿易)이라 함은 물공(物貢)의 형식(形式)을 통(通)하여 나라와 나라사이의 공적무역(公的貿易)을 행(行)하는 것으로 이는 중국(中國) 사람들의 대국연(大國然)하는 자존심(自尊心)에 말미암은 것이며 우리 나라에서 공물(貢物)의 형식(形式)으로 내어가는 물건(物件)은 금은(金銀), 인삼(人蔘), 표피(豹皮), 저포(苧布), 화문석(花紋席), 나전(螺鈿), 백지(白紙) 등(等)이었고 그 대신(代身) 저쪽에서 들어오는 것은 주(主)로 견단(絹緞), 자기(磁器), 약재(藥材), 서적(書籍) 등(等)이었으며 이밖에도 국경(國境) 지대(地帶)의 사무역(私貿易)과 밀무역(密貿易)을 통(通)하여 두 나라 사이의 물자(物資)가 많이 교류(交流)되었으니 이 시대(時代)는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비교적(比較的) 자유(自由)로 중국(中國)으로 왕래(往來)하면서 학문(學問)도 배우고 무역(貿易)도 하던 때와 달라서 공적(公的)으로 중국(中國)을 다니는 이외(以外)에는 왕래(往來)를 엄금(嚴禁)하는 쇄국시대(鎖國時代)라 물자(物資)의 유무상통(有無相通)이 여의(如意)치 못함으로 압록강(鴨綠江) 안(岸)의 중강진(中江鎭)과 두만강(豆滿江)안(岸)에서 년(年) 일이차(一二次) 공적무역(公的貿易)을 행(行)하는 외(外)에 밀역(密易)이 연중(年中) 성행(盛行)하였다. 명(明)나라에 바치던 금은(金銀) 공(貢)은 세종(世宗)때에 외교(外交) 교섭(交涉)에 의(依)하여 면제(免除)되고 그 후(後)로는 우리 나라에서 금은(金銀)이 나지 아니함을 보이기 위(爲)하여 금은광(金銀鑛)을 폐(廢)한 일도 있었다.
일본(日本)과의 사이는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대마도(對馬島)를 친 이후(以後)로 한때 교통(交通)이 그쳤었으나 대마도(對馬島)는 산(山)이 많고 식량(食糧) 기타(其他) 물산(物産)이 적어서 우리 나라의 힘을 입지 아니하면 살아갈 수가 없음으로 저쪽에서 사죄(謝罪)의 뜻을 표(表)하고 다시 서로 화호(和好)하기를 간청(懇請)하였다. 이에 세종(世宗)은 삼포(三浦)를 열어서 대마도인(對馬島人)이 와서 무역(貿易)함을 허락(許諾)하니 삼포(三浦)라 함은 제포(薺浦)(지금의 창원군(昌原郡)마산방(馬山傍)제덕리(薺德里)의 내이포(乃而浦) 부산포(釜山浦) 울산(蔚山)의 염포(塩浦)이다. 그 후(後)에 계해조약(癸亥條約)을 맺어서 해마다 대마도(對馬島) 왕(王)이 보내는 배를 오십(五十)척(隻)으로 한정(限定)하며 또 미두(米豆) 이백석(二百石) 씩 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무역품(貿易品)을 왜인(倭人)들은 동(銅) 은(銀) 유황(硫黃) 등(等)의 광산물(鑛産物)을 비롯하여 남양(南洋)의 특산(特産)인 소목(蘇木) 호초(胡椒) 향료(香料) 등(等)을 들여오고 우리 나라에서는 면포(綿布) 마포(麻布) 미두(米豆) 백지(白紙) 서적(書籍)(특히 대장경(大藏經))을 보내었다.
여진(女眞)과의 사이에는 두만강(豆滿江) 기슭에 경성(鏡城) 경원(鏡源)의 무역소(貿易所)를 열어서 그들의 마필(馬匹)과 여러 가지 수피(獸皮) 즉(卽) 토표피(土豹皮), 초서피(貂鼠皮), 웅피(熊皮), 녹피(鹿皮)를 들여오는 대신(代身) 이쪽에서 금은(金銀), 마포(麻布), 저포(苧布), 면포(綿布), 농구(農具), 부정(釜鼎), 유기(鍮器), 백지(白紙), 염장(鹽醬), 주(酒) 등(等)을 내어 보냈으며 또 여진(女眞)의 추장(酋長)들에게 직첩(職帖)을 주어서 그 계급(階級)에 따라 서울에 와서 진상(進上) 숙배(肅拜)한 이름으로 공적무역(公的貿易)을 하게 하니 이는 조공무역(朝貢貿易)의 형식(形式)을 본뜬 것이다. 이리하여 서울에는 지금의 태평로(太平路)에 태평관(太平館)이 있어 명(明)나라 사신(使臣)들을 접대(接待)하고 동대문(東大門)안에는 북평관(北平館)이 있어 왜인(倭人)들이 들게 하였다. 그들이 와서 묵을 때면 후시(後市)라는 명목(名目)으로 館所 에서 무역(貿易)이 행(行)하여 졌다. 이 밖에 유구국(琉球國)에서도 자주 사신(使臣)을 보내어와서 소목(蘇木), 호초(胡椒), 향료(香料), 설당(雪糖), 석(錫), 서각(犀角) 등(等)의 여러 가지 진기(珍奇)한 남양산물(南洋産物)을 가져오고 우리 나라의 면포(綿布), 마포(麻布), 대장경(大藏經) 등(等)을 얻어 갔으며 섬라(暹羅)(지금의 태국(泰國))에서도 방물(方物)을 가지고 사신(使臣)을 보내온 일이 있었다.
그러나 외국(外國) 사신(使臣)이 우리 국경(國境)에 들어오면 정부(政府)에서 그들을 후대(厚待)하는 뜻으로서 서울까지 오는 비용(費用)과 서울에서 머물고 다시 돌아 갈때 국경(國境)까지 나가는 비용(費用)을 부담(負擔)하였고 그 보내는 물건(物件)도 가져온 물건(物件)의 몇배(倍)를 주었음으로 남양(南洋)의 여러 나라에서는 자주 사신(使臣)을 보내게 되었고 우리 나라의 부담(負擔)이 적지 아니하니 이는 외국(外國)이 우리 나라에 조공(朝貢)한다는 형식(形式)을 꾸미고 무역상(貿易上) 실권(實權)을 취(取)하려 함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외국(外國)의 조공(朝貢)을 받는 것을 만족(滿足)하게 생각할 뿐이오 우리 나라 사람이 해외(海外)에 나가서 무역(貿易)하는 길을 전연(全然) 폐쇄(閉鎖)하여 버리니 이 까닭에 무역관계(貿易關係)에는 항상(恒常) 손(損)을 보고 국민(國民)의 해외(海外) 웅비(雄飛)의 기상(氣象)은 날로 사라졌다.
성종(成宗)의 세(世)는 건국(建國)한지 이미 팔구(八九)십년(十年)이라 국가(國家)의 기초(基礎)가 굳어진 때라 점차(漸次) 보수(保守)의 경향(傾向)이 생(生)하고 모든 부면(部面)에 경화(硬化) 침체(沈滯)의 빛이 농후(濃厚)하여지니 사가(史家)들은 이를 성극시대장쇠(盛極時代將衰)의 기(期)라 한다.
특(特)히 귀족(貴族)의 세력(勢力)이 강(强)하고 반상(班常)의 구별(區別)이 엄(嚴)하며 전국적(全國的)으로 불과(不過) 삼십(三十) 내외(內外)의 족벌(族閥)이 정치(政治)를 전행(專行)하고 지방별(地方別)로는 경기(京畿) 충청(忠淸) 경남(慶南)의 삼도(三道)가 귀족(貴族) 주거(住居)의 중심(中心)이 되었다. 또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제도(制度)가 더욱 엄격(嚴格)하여 여자(女子)의 개가(改嫁)를 불허(不許)하고 재가(再嫁)녀(女)의 소생(所生)한 자손(子孫)은 국가(國家)가 서용(敍用)치 아니하고 귀족(貴族)들은 과부(寡婦)를 금고(禁錮)하는 것을 가내(家內)의 영예(榮譽)로 여겼으며 첩(妾)의 소생(所生)한 자손(子孫)은 서얼(庶孼)이라 하여 천대(賤待)하고 서자(庶子)들은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하니 이 서자(庶子)는 소위(所謂) 그 아비된 자(者)가 향락(享樂)과 음욕(淫慾)의 만족(滿足)을 얻기 위(爲)하여 생(生)긴 산물(産物)이오 모복(母腹)으로부터 낙지(落地)하는 순간(瞬間)이 이미 천대(賤待)를 받을 운명(運命)을 가졌으니 서자(庶子)의 서자(庶子)된 죄(罪)는 아비에게 있는 것이오 서자(庶子)자신(自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아비된 자(者)는 첩(妾)을 축(蓄)하는 날에 벌써 서자(庶子)의 출생(出生)할 것이 약속(約束)되었고 그 서자(庶子)가 사회(社會)로부터 천대(賤待)를 받는 것을 알면서 축첩생활(蓄妾生活)을 하는 것은 그 심신(心身)의 부패(腐敗)한 所致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오 더욱이 서자얼(庶子孼) 천대(賤待)의 제도(制度)는 축첩(蓄妾)을 가장 많이 하는 귀족계급(貴族階級)들이 만든 것이다.
세조(世祖)때에는 강력(强力)한 전제정치(專制政治)를 행(行)하여 비록 간관(諫官)이라 하더라도 언론(言論)의 자유(自由)를 행(行)치 아니하더니 성종(成宗)이 성질(性質)이 인유(仁柔)하고 언어(言語)를 개(開)하여 간관(諫官)들의 언론자유(言論自由)를 인(認)하니 이에 유신(儒臣) 대(對) 공신척리(功臣戚里)의 싸움이 벌어졌다. 유신(儒臣)들은 세조(世祖)때에 가슴속에 쌓여 있으되 발표(發表)할 수 없었던 울분(鬱憤)이 일시(一時)에 터져 나와서 공신척리(功臣戚里)의 조금이라도 과오(過誤)를 범(犯)함이 있는 때는 일호(一毫)의 관용(寬容)이 없이 논박(論駁) 공격(攻擊)하고 어느 한 사람이 공격(攻擊)을 시작(始作)하면 유신(儒臣) 전체(全體)가 그를 응원(應援)하여 조정(朝廷)은 유신(儒臣)이 지도권(指導權)을 잡고 성종(成宗)도 대체(大體)로 유신(儒臣)들의 말을 청종(聽從)하였다.
이때의 유교(儒敎)는 고려시대(高麗時代)의 한학(漢學)과 달라서 송(宋)나라의 정주학(程朱學)인 성리학(性理學)을 말하는 것이니 성리학(性理學)을 또한 이기설(理氣說)이라 하고 김종직(金宗直)의 제자(弟子) 가운데서 성리학(性理學)에 가장 밝은 사람은 정여창(鄭汝昌)(호(號) 일두(一蠹)) 김굉필(金宏弼)(호(號) 한훤당(寒暄堂))이니 정여창(鄭汝昌)의 이기론(理氣論)에는 「理의 在하는 바에 氣가 또한 聚하고 氣가 動하는 바에 理가 또한 着하여 彼此의 別이 없다. 그러나 理는 혼연지선(渾然至善)하여 爲함이 없고 氣는 순리청탁(醇醨(漓)淸濁)하여 運用이 있어 피차(彼此)의 別이 있으니 이를 一하되 二하고 二하되 一한다 함이다. 理가 없으면 氣가 응주(凝做)할 바가 없고 氣가 없으면 理가 流行치 못한다」하니 이것이 理氣說의 大要이다. 이 이기설(理氣說)의 새로운 이론(理論)은 청년학자(靑年學者)들 사이에 환영(歡迎)되고 李朝一代 學問의 中心이 되었다.
이와 같이 유교(儒敎)를 숭상(崇尙)하였음으로 교육(敎育)과 과거(科擧)도 또한 유학(儒學)을 中心으로 하였으니 교육기관(敎育機關)으로는 서울에 성균관(成均館)(지금의 국립대학교)을 비롯하여 사부학당(四部學堂)이 있고 외방(外方)에는 고을마다 향교(鄕校)가 있고 마을에는 서당(書堂)이 있어 주(主)로 유교(儒敎)의 경전(經典)을 가르쳤고 이밖에 특수(特殊) 과목(科目)으로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학(醫學) 율학(律學) 산학(算學) 서학(書學) 화학(畵學)을 연구(硏究)하는 기관(機關)이 있고 또 한어(漢語) 여진어(女眞語) 몽고어(蒙古語) 왜어(倭語) 등(等)을 가르치는 기관(機關)도 있다.
과거(科擧)는 국가(國家)에서 인재(人才)를 취(取)하는 최고(最高) 시험(試驗)이라 태종(太宗) 세종(世宗)의 시대(時代)에는 주(主)로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등(等) 주요(主要)한 현실문제(現實問題)에 대(對)한 논문(論文)을 시험(試驗)하더니 성종(成宗) 이후(以後)에는 그러한 논문(論文) 시험(試驗)이 점점 적어지고 주(主)로 문장(文章)을 취(取)하는 시부표책(詩賦表策) 등(等)의 시험(試驗)이 행(行)하니 이 시부표책(詩賦表策) 등(等)의 시험(試驗)은 그 속에 치국(治國) 경륜(經綸)이 있는 것도 아니오 국민생활(國民生活) 상(上)에 어떠한 관련(關聯)이 있는 것도 아니오 다만 공교(工巧)로운 심장적구(尋章摘句)와 음풍농월(吟風弄月)을 일삼는 것이니 이 까닭에 소위(所謂) 학문(學問)은 형식(形式)에 흐르고 실용(實用)이 없는 귀족계급(貴族階級)의 유희물(遊戱物)이 되고 말았다. 그럼으로 정여창(鄭汝昌)같은 이는 교시(巧詩) 하는 士를 取하지 아니하여 말하되 「詩는 성정(性情)의 發함이라 어찌 설설(屑屑)하게 工夫를 강하(强下)하리오」하였다.
이조개국(李朝開國) 後에 외방관리(外方官吏)의 민폐(民弊)를 作하는 者가 있고 없음을 조사(調査)하기 爲하여 자주 경차관(敬差官)이라는 특사(特使)를 보내더니 그 後에 그 관명(官名)을 어사(御使)라 고쳐서 비밀(秘密)히 각도(各道)에 보내 이가 암행어사(暗行御史)의 기원(起源)이다. 성종(成宗)때에 이르러 王이 성질(性質)이 인유(仁柔)하여 官吏가 罪를 받는 者가 極히 적고 태평성대(泰平盛代)라고 일컬었으나 그 반면(反面)에 민폐(民弊)를 작(作)하는 관리(官吏)가 많이 생겨서 사회내부(社會內部)에 퇴폐(頹廢)의 기운(氣運)이 싹트기 시작(始作)하였다. 이에 암행어사(暗行御史)를 각도(各道)에 파견(派遣)하니 당시(當時) 조지서(趙之瑞) 정광필(鄭光弼) 김일손(金馹孫) 같은 이가 모두 명어사(名御使)였다.
어사(御使)의 임무(任務)는 대체(大體)로 국법(國法)을 지키지 않는 者, 부모(父母)에 불효(不孝)하는 양풍미속(良風美俗)을 해(害)하는 者, 수령(守令)이나 이서(吏胥)들이 국곡(國穀)을 도적(盜賊)하고 인민(人民)을 괴롭게 하는 者等 법률(法律)과 도덕(道德)에 어그러지는 행위일체(行爲 一切)를 조사(調査)하고 그것을 범(犯)한 者를 발견(發見)할 時는 王의 대리(代理)의 자격(資格)으로 그 고을에 출도(出道)하여 혹(或)은 수령(守令)을 파면(罷免)시킬 수도 있고 혹(或)은 죄인(罪人)을 선참후계(先斬後啓)할 수도 있음으로 외방(外方)에서는 어사(御使)를 호(虎)라고도 불렀다.
어사(御使)가 수월(數月)의 동안에 일도(一道)를 순행(巡行)하는 것임으로 간리(奸吏)들의 소행(所行)을 一 一히 탐지(探知)할 수는 없으나 한번 출동(出動)하면 일도(一道)가 숙연(肅然)하여 간악(奸惡)을 자행(恣行)치 못하니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집에 축묘(畜猫)가 있으매 서(鼠)가 사행(肆行)치 못한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