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高麗)의 멸망(滅亡)
공민왕(恭愍王) 말년(末年)에 원(元)나라가 북(北)으로 쫓겨가고 명(明)나라가 중원(中原)을 차지하게 되니 (단기 삼천칠백일년) 고려(高麗) 조정(朝廷)에서는 대륙(大陸) 외교(外交)에 대(對)하여 두 가지 의견(意見)이 대립(對立)되었다. 최영(崔瑩)은 오래 동안 원(元)나라에 가 있어서 저쪽의 사정(事情)을 잘 알고 있음으로 원(元)나라와 명(明)나라의 현(現) 세력(勢力)이 아직 정(定)해진 것이 아니니 우리는 원(元)나라와 사귀고 명(明)나라를 누르면서 이 기회(機會)에 요동(遼東)을 회복(恢復)하여 국세(國勢)를 다시 한번 떨쳐보자 하고 이성계(李成桂)는 명(明)나라가 이미 중원(中原)을 차지하였으니 우리는 천하(天下)의 대세(大勢)에 어김없이 원(元)나라에 대(對)하던 태도(態度)로써 명(明)나라를 대(對)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主張)하니 이것이 소위(所謂)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와의 대립(對立)이다. 그러던 차(次)에 명(明)나라는 차츰 요동(遼東)을 평정(平定)하고 우왕(禑王) 십사년(十四年)에 이르러서는 철령위(鐵嶺衛)를 세우고 장차(將次) 압록강(鴨綠江)이쪽의 땅을 빼앗으려 하니 최영(崔瑩)이 이제는 더 참을 수 없다하여 명(明)나라를 치기로 결정(決定)하니 이성계(李成桂)는 여러 번 왕(王)에게 글을 올려 반대(反對)하였다.
최영(崔瑩)은 조금도 북벌(北伐)계획(計劃)을 굽히지 아니하고 스스로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왕(王)과 함께 서경(西京)으로 나가서 조민수(曹敏修)와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군사(軍士) 오만(五萬)을 거느리고 가서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북벌(北伐)을 반대(反對)하는 이성계(李成桂)에게 대군(大軍)을 주어서 그 계획(計劃)을 실현(實現)하려 한 것이 최영(崔瑩)의 일대실책(一大失策)이었다. 이성계(李成桂)는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서 위화도(威化島) (을혜섬)에 머무는 차에 조민수(曹敏修)를 달래어 장마철에 많은 군사(軍士)가 강(江)을 건너가기 어렵고 또 명(明)나라는 새로 일어나서 그 강대(强大)한 기세(氣勢)를 대적(對敵)하기가 쉽지 아니하니 여기서 회군(回軍)하는 것이 옳다하고 풍우(風雨)같이 서경(西京)을 향(向)하여 행진(行進)하니 이것은 분명(分明)히 왕명(王命)을 거역(拒逆)하는 일이라 군사중(軍士中)에서는 벌써 목(木)자(子) 득국(得國)이라는 요언(謠言)이 성행(盛行)하고 최영(崔瑩)은 왕(王)과 함께 형세(形勢)가 이미 틀리고 이성계(李成桂)의 손에 잡혀 죽으니 국인(國人)이 최영(崔瑩)의 죽음을 듣고 도하(都下)가 모두 철시(撤市)하여 조(弔)하고 원근(遠近)의 남녀노소(男女老少) 없이 모두 서로 붙들고 울었다. 이성계(李成桂)는 우왕(禑王)의 아들을 세우니 이가 창왕(昌王)이다. 이로부터 이성계(李成桂)가 권세(權勢)를 한 손에 잡고 안으로는 그의 반대파(反對派)를 몰아내고 밖으로는 명(明)나라와 친(親)하여 고려(高麗)의 운명(運命)은 이미 조석(朝夕)으로 보전(保全)하기 어렵게 되었다.
처음에 공민왕(恭愍王)때에 승(僧) 신돈(辛旽)을 써서 국정(國政)을 맡겼다가 실정(失政)을 보고 신돈(辛旽)을 죽였는데 우왕(禑王)은 혹(或)은 공민왕(恭愍王)의 아들이라 하고 혹(或)은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왕실(王室)을 중심(中心)으로 기괴(奇怪)한 풍설(風說)이 크게 유행(流行)하니 우왕(禑王)을 왕대(王代)라 하는 것은 주(主)로 왕대(王代) 조정(朝廷)을 지지(支持)하려는 사람이오 신대(辛代)라 하는 것은 주(主)로 이성계(李成桂)를 중심(中心)으로 한 혁명파(革命派)이다. 이성계(李成桂)는 우왕(禑王)을 신대(辛代)라 하여 몰아내어 죽이고 그 아들 창왕(昌王) 또한 신대(辛代)의 혈통(血統)이라 하여 몰아내어 죽이고 왕대(王代)중에서 가장 암약(暗弱)한 공양왕(恭讓王)을 세우니 이때로부터는 이미 이성계(李成桂)의 천하(天下)가 되고 만 것이다.
고려(高麗)의 전제(田制)는 문란(紊亂)할대로 문란(紊亂)하여 이를 사무적(事務的)으로 바로잡을 수 는 없었다. 이에 조준(趙浚) 등(等)이 사전(私田) 개혁(改革)을 주장(主張)하여 훈신(勳臣) 귀족(貴族)들의 맹렬(猛烈)한 반대(反對)가 있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세력(勢力)이 이를 지지(支持)하여 고려(高麗)가 망(亡)하기 전(前)해인 공양왕(恭讓王) 삼년(三年)에 옛날의 과전제(科田制)를 부활(復活)하는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斷行)하고 사전(私田) 문권(文券)을 서울의 한 복판에 쌓아 놓고 만민(萬民) 환시중(環視中)에 불살라 버리니 이로써 이성계(李成桂)의 세력(勢力)은 농민(農民)들의 환영(歡迎)을 받고, 한편(便) 묵은 귀족(貴族)들의 세력(勢力)을 무너뜨리어 세력(勢力)은 더욱 커지고 또 국가(國家)의 재원(財源)을 넉넉하게 하여 이씨조선(李氏朝鮮) 건국(建國)의 경제적(經濟的) 기초(基礎)를 삼았다.
우리 나라 의복(衣服) 자료(資料)는 마포(麻布)가 가장 주(主)되고 그밖에 중국(中國)으로부터 수입(輸入)되는 면포(綿布) 등(等)이 있고 농촌(農村)의 세민층(細民層)은 구피(拘皮)를 입는 자(者)도 적지 아니 하였다. 그러던 중(中) 공민왕(恭愍王)때에 문익점(文益漸)이 중국(中國)에 갔다가 교지(交趾베트남)로부터 면화(棉花) 종자(種子)를 가져오는데 이때 원(元)나라에서는 면화(棉花) 종자(種子)를 외국(外國)에 보내는 것을 엄금(嚴禁)하고 있었음으로 문익점(文益漸)은 필관(筆管)속에 비밀(秘密)히 넣어 가지고 와서 심은 것이 우리 나라 면화(棉花) 재배(栽培)의 시초(始初)이며 고려(高麗)가 망(亡)할 무렵에 전국(全國)에 퍼져서 우리 나라 의복계(衣服界)에 일(一) 신기원(新紀元)을 그었던 것이다.
고려(高麗)의 왕실(王室)을 지켜가고 이성계(李成桂)의 세력(勢力)을 눌러 보려고 하는 사람들 중(中)에 그 중심(中心) 인물(人物)은 정몽주(鄭夢周)였다. 그러나 정몽주(鄭夢周)는 일개(一個) 문신(文臣)이라 아무 무력적(武力的) 실력(實力)이 없더니 공양왕(恭讓王) 사년(四年)에 이성계(李成桂)가 해주(海州)에 갔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상(傷)하였다는 소문(所聞)을 듣고 이를 기회(機會)로 이성계(李成桂)를 몰아내려 하였으나 이성계(李成桂)가 송경(松京)에 돌아오고 그 아들 이방원(李芳遠)이 자객(刺客) 조영규(趙英珪)를 보내어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鄭夢周)를 처 죽였다.
정몽주(鄭夢周)가 죽자 고려(高麗)의 운명(運命)도 이와 함께 다 하였다. 그해 칠월(七月)에 이성계(李成桂)는 공양왕(恭讓王)을 폐(廢)하여 원주(原州)로 내치고 왕위(王位)에 오르니 이가 이태조(李太祖)이오 (단기 삼천칠백이십오년) 임신(壬申) 고려는 삼십사왕(三十四王) 四百七十五年으로 끝마쳤다.
高麗時代는 三國時代의 무용(武勇)의 유풍(遺風)이 있어 능(能)히 계단(契丹) 몽고(蒙古) 홍건적(紅巾賊) 왜구(倭寇)와 같은 대적(大敵)을 막아 싸우니 당시(當時)의 유물(遺物)로서 건축(建築)에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 조각(彫刻)에 은진(恩津)의 미륵불(彌勒佛) 등(等)은 미술(美術)로도 유명(有名)하거니와 그 굳세고 힘찬 모습은 그때 사람의 기질(氣質)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말엽(末葉)에 이르러 종래(從來)에 국난(國難)이 있을 때는 귀족(貴族)의 자제(子弟)가 진(陣)의 선두(先頭)에 나서던 진실(眞實)한 풍(風)이 없어지고 세력(勢力)이 있는 자(者)들이 병역(兵役)을 기피(忌避)하는 풍(風)이 생(生)하니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에 유학(儒學)을 배우는 학생(學生)들이 우리는 공자묘(孔子廟)를 지키는 유생(儒生)들이니 전쟁(戰爭)에 나갈 수 없다고 정부(政府)에 청원(請願)한바 그때 정승(政丞) 염제신(廉悌臣)이 엄책(嚴責)하여 왈(曰) 국난(國難)이 있을 때에 귀족(貴族)자제(子弟)들이 먼저 칼을 잡고 나가는 것은 조종(祖宗) 이래(以來)의 상규(常規)라 너희들이 공자묘(孔子廟)를 빙자(憑藉)하는 것은 병역(兵役)을 기피(忌避)함이라 너희들이 지키지 아니하면 공자묘(孔子廟)가 어디로 도망(逃亡)가느냐 하고 일제(一齊)히 전쟁(戰爭)에 내어 보낸 일이 있으니 이것이 고려(高麗)사람의 기질(氣質)의 변함이오 이 변화(變化)한 기질(氣質)이 이조(李朝)에 상속(相續) 되었다.
고려사회(高麗社會)의 부패(腐敗)는 혁명(革命)을 불렀고 혁명(革命)은 사회발전(社會發展) 과정(科程)에 있어서 일대(一大) 청신제(淸新劑)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李成桂)는 공민왕(恭愍王) 삼년(三年)에 이미 전제(田制)를 개혁(改革)한 뒤에 자기(自己)가 국왕(國王)이 되지 아니하면 안되겠다는 정치개혁(政治改革)에 대(對)한 주장(主張)을 내 세운 것이 없고 다만 왕대(王代) 사직(社稷)을 빼앗으려는 권력(權力) 다툼만을 일삼았기 때문에 조신중(朝臣中)에는 이성계(李成桂)의 혁명(革命)에 대(對)하여 강렬(强烈)한 반대(反對)를 한 자(者)가 적지 아니하고 그 중(中)에는 송경(松京)의 두문동(杜門洞)에 숨어서 일생(一生)을 이씨(李氏)의 앞에 무릎을 굴(屈)치 안한 자(者) 있으니 이를 두문동(杜門洞) 칠십이현(七十二賢)이라 한다.
칠십이현(七十二賢)과 그 자손(子孫)들은 이씨(李氏)에 복(服)하지 아니하고 혹(或)은 유기(柳器) 피혁장(皮革匠)등 천업(賤業)을 하는 자(者)도 있고 혹(或)은 상업(商業)에 몸을 던져 송경(松京)과 연안(延安) 배천(白川)의 사이를 왕래(往來)하는 자(者)도 있었으니 지금의 개성(開城) 사람의 상업술(商業術)이 일국(一國)에 유명(有名)하고 개성상업부기(開城商業簿記)가 서양식(西洋式) 부기(簿記)와 병칭(倂稱)되고 있는 것은 당시 두문동(杜門洞) 제현(諸賢)의 창안(創案)으로 된 까닭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