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22

"3학년 때 돌아오면 나 알아봐 줄 거지?" 그녀가 물었다.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당연하지. 고작 1년 갖고 있을 리 없지." 쓸쓸한 마음을 가다듬고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추운 겨울밤, 그녀가 아주 먼 곳으로 떠나기 전이었다. "안아줘도 돼?" "응." 나와 같은 옷을 입은 그녀를 껴안으며 말했다. "나, 널 좋아해." "나도 좋아해." 껴안은 품은 추위를 잊을 만큼 따뜻했다. 한동안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지난 1년간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순간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차오르려 했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2학년을 맞이했을 때 역시 그녀를 떠올리며 지냈다. 잊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학업과 친구들과의 관계도 중요했다.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야 할 시기였다. 그리고 얼마 안 지나 나는 현재의 내 일생에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분명 3학년은 금방 찾아올 테니. . . . '삐리리리리릭' 우렁찬 알람 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이 들었다. 6시 30분으로 알람을 맞추어놓고 잤으니 대략 6시간 정도 잤을 것이다. "어.. 어... 졸려...." 최대한 눈을 작게 뜨며 핸드폰 알람을 6시 35분으로 맞추고 다시 뻗었다. '삐리리리리릭' 눈을 감자마자 곧바로 알람이 울렸다. 시간은 정말로 5분이 지나가 있었다. 수업 시간의 5분은 긴데, 잠깐 눈을 붙일 때의 5분은 5초같이 느껴진다.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잠을 더 잘까 말까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더 잔다면 6시 40분. 그렇게 되면 시간이 촉박해질 수 있다. 새 학기 첫날인데 정신 차리고 여유 있게 등교해야지 하고 짧은 다짐을 한 나는 미리 맞추어 놓은 알람들을 모두 해제하고, 졸음을 깨기 위해 온몸에 힘을 실어 벌떡 일어났다. 한동안 세탁실에 맡겨놓아 랩에 씌워져 있던 교복 조끼와 와이셔츠를 풀었다. 굳이 코를 갖다 대지 않아도 좋은 냄새가 났다. 지난 두 달간 교복을 입지 않은 탓인지 벌써 교복을 입는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새삼스럽게, 학교에 교복을 입고 가는 게 뭐가 어색하다고.. 남은 1년도 잘 부탁한다 교복아. 내가 다니는 학교는 집에서 거리가 있어 버스를 타고 등교해야 하는 유지 고등학교라는 곳이다. 인문계지만, 개발이 끝난 깔끔한 신도시의 중심으로서 매년 신입생 지원율이 정점을 찍는 꽤 잘 나가는 학교다. 나는 벌써 3학년이 되었고 10대의 끝자락에 서게 되었다. 남은 1년도 열심히 학업 성적을 관리해 좋은 대학에 가자는 게 나의 목표였다. "2100원 입니다." 여느 때처럼 아침 식사는 등굣길 편의점에서 해결했다. 지금은 비록 혼자지만, 입학 첫날도 아니니 긴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머릿속은 걱정으로 가득 찼다. 우리 반에 아는 애가 몇 명 있지? 딱히 친한 애는 없었던 거로 기억한다. 기존에 친했던 애들과는 반이 다 다르기에. 나는 3학년이므로 학교 외곽에 위치한 신관으로 가면 된다. 이미 몇 번 갔던 적은 있었다. 활동했던 동아리가 신관에 있으니까. 그치만 정작 신관에 들어오니 조용한 분위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음. 으흠." 헛기침을 몇 번 하고, 3학년 2반 교실에 들어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차분하게 교실 내부를 둘러봤다. 아직 9시까지 10분이 남아서인지 인원은 반도 안 온 상태였다. 조용히 자리에 앉아 주변을 살펴봤다. 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각자 본인 자리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었고 몇몇은 벌써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야야, 선우야." 핸드폰의 화면을 키기도 전에 나를 향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곳은 교실 앞문 쪽이었다. 내가 그쪽을 쳐다봤을 땐, 커다란 손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 주원이냐?" "오랜만이야. 요즘 어떻게 지냈어?" 날 불러낸 건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서주원이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같이 다니다가 같은 고등학교로 오게 되고, 최근에는 만난 적이 전혀 없던 친하지만 살짝 어색해진 친구. 역시나 동복으로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아무리 첫날이라도 3학년이 동복을 입고 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지금의 내 패션만 봐도 춘추복 위에 패딩을 입고 있다. "어떻게 지내긴, 놀고 먹고 평소랑 똑같지. 너는?" "나도 그래. 학원에 있을 때 빼면 놀기만 했어." 참고로 이 주원이란 친구는 작년 하반기에 전교 회장 선거에서 압도적인 투표율로 회장의 자리를 차지했다. 기존부터 학생회였고, 공부를 꾸준히 잘하고 인간관계가 넓어 본인의 마지막 소원이라던 학생회장이란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주원이를 만날 때마다 초라한 나에 비해 주원이가 아깝다고 생각해 괜히 이것저것 사리게 된다. "아, 그리고 후배들 입학식 끝나고 학생회실에 가 봐." 한창 나누던 이야기가 마무리될 시점에 주원이가 한 가지 소식을 알렸다. "학생회실은 왜? 나 학생회 아니잖아." "동아리 부장들 모여서 오리엔테이션 한대." 그렇구나. 하고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듯 소식을 들었다. 그러고 대략 5초 뒤, 주원이가 뒤돌아설 때 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나는 급하게 주원이를 멈춰 세웠다. "나 부장 아닌데??!!" 당황해서 볼륨조절에 실패하자 주원이는 놀랐는지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 "홈페이지로 결과 다 나왔는데 확인 안 했어? 너 창작부 부장이야." "...." 창작부는 내가 지난 2년 동안 활동했던 동아리다. 올해에도 계속할 생각이긴 했지만 분명 난 작년에 내가 창작부 부장을 맡게 될 거라는 말을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 그저 편하게 지내려는 건 내 욕심이었을까. 뭔가 심상치 않은 엄청나게 귀찮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경력순으로 뽑는 거 몰라?" "몰랐어.. 갑자기 부장이라니 예상 하나도 못 했는데." "나도 전해 들은 거라, 있다가 오티에서 한 번 물어봐봐. 취소할 수도 있을 거야." "아, 아니야. 부장 그까짓 거 해야지 뭐." 어느 정도 얘기를 끝마친 뒤 주원이는 손을 한 번 올려 인사를 하고 본인 갈 길을 갔다. 나도 역시 손을 흔들어 주원이를 보냈지만, 당황스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부장이라면, 작년에 선배가 했던 일들을 내가 맡게 되는 것이다. 머리도 어느 정도 잘 굴려야 할 테고, 리더십도 있어야 하고, 처음 보는 후배들한테도 잘 대해줘야 하고.... 그냥 취소할까? 근심 가득한 한숨을 쉬며 교실로 돌아서니 이전보다 애들이 많이 채워져 있었다. 그나마 이렇게 한꺼번에 보니 익숙한 애들이 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작년까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던 애도 있다. '띠리리리리링' 아직 생각해야 할 게 많은데, 벌써 9시가 되어버려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종소리와 동시에 새 담임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서 활기가 넘치던 교실은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모두 강당으로 이동. 1학년 후배들한테 선배다운 모습 잘 보여야 해." 시간이 없는 탓에 담임 선생님은 짧게 자기소개를 하다가 우리들을 곧바로 강당으로 이동시켰다. 벌써 후배가 이렇게나 많아졌다니 신기했다. 게다가 이번 1학년들은 우리 3학년의 2배가 넘는 인원이 들어왔다고 들었다.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압도당하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떼를 지어 이동하는 수많은 학생들, 그리고 그 무리를 바라보는 나. 지난 반 친구를 찾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기억 속의 몇몇 인물을 찾고 있다. 분명 내가 작년에 주로 누구와 어울려 지냈는지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고, 구석구석 떠올려보면 우리 반에서도 존재한다. 걸음의 속도를 낮추고 주변을 살폈다. 박.. 박... 시.. 뭐였더라? 아, 박시준! 그 투블럭 머리! "야-아! 박시준. 혼자냐?" 때마침 눈에 띄는 아무 생각 없어 보이던 박시준에게 달려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박시준은 힘 빠진 목소리로 '응?'하다가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화들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뭐야, 너, 이선우인가? 이선우 걔 맞지?" 언제나처럼 오버액션을 하며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는 박시준. 난 이미 전부 익숙해져 있었다. 역시 몇 개월이 지나도 작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 어. 맞아. 2년째 같은 반이네." "어, 그러네? 이야~ 이렇게 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정신없는 복도에서 우린 아주 천천히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사실 지금 할 얘기라 봤자 방학 동안 뭐 했냐는 주제밖에 없긴 하다. 박시준은 방학 동안 알바만 해서 돈을 꽤나 모았다고 한다. 난 뭐 했더라? 알바야 뭐 지원은 했다만 답장이 없었고... "니 돈 벌었으니까 먹을 것 좀 사주라." 장난으로 한마디 툭 던져봤다. 나도 알바하고 싶었는데, 너무 열심히 자랑하는 시준이를 보니 방학 때 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아졌다. 작년에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벌써 사달라는 말을 꺼내도 되는지 나중에서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 햄버거 고고?" 쿨하게, 정말 쿨하게 수락하는 시준. 나는 기쁨 반 당황 반으로 얼굴이 굳어버렸다. 바로 수락하기에는 애매하고 바로 거절하면 후회만 남을 것 같았다. "진짜? 그럼 다음에 한 번 가자."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잠을 많이 못 잔 탓에 아침부터 하품을 해왔지만 박시준과 대화를 하다 보니 왠지 모르게 졸음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입학식은 언제나 그래왔듯, 정말 간단하고 스피드하게 진행됐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도, 학생회장인 주원이의 환영 인사도 합해서 10분이 넘지 않았다. 꼿꼿하게 줄을 선 채로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후배들의 진영을 관찰했다. 역시나 어마어마한 인원이 빽빽하게 붙어 있는 1학년들. 뭔가 웅장하면서도 무서웠다. 반면에 인원이 별로 많지 않은 2학년들을 구경하다가, 동시에 이쪽을 바라보던 아는 후배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멀리서 손을 살살 흔들며 나에게 인사하는 후배에게 나도 손을 한번 흔들어 대답했다. 왠지 모르게 전보다 키가 더 커진 것 같았다. 주변인들에 비해 홀로 우뚝 서 있는 것을 보면.. 이상하다, 작년엔 분명 나보다 키 작았는데. "야, 어디 보냐?" 내 앞에 서 있던 시준이가 뒤를 돌아본 후 의아해하며 물었다. "응? 그냥 후배들 구경하는데?" "이상형 있나 찾게?" "뭔 소리야." 이상형은 무슨 이상형.. 자기 혼자 말하고, 혼자 웃는 시준이를 보면 어이가 없어서 나까지 웃음이 나온다. 고쳐 말해 텐션을 억지로 끌어올리는 느낌이랄까. "입학식 끝났어. 가자." "그래.." 지시에 따라 3학년부터 강당을 빠져나왔다. 실내의 갑갑한 공기만 마시다가 밖으로 빠져나오니 상쾌함이 느껴져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내뱉었다. 신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나친 자그마한 학교 정원은 거의 쑥대밭이나 다름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눈이 내릴 정도로 기온이 낮기 때문에 모든 풀과 나뭇잎에는 서리가 잔뜩 껴 있었다. 텅 빈 정원을 쳐다보면서, 패딩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내며 걷고 있었다. 다시 교실에 돌아왔을 때는 이전보다 훨씬 활발해진 분위기에 조금 당황을 했다. 모두들 본인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서로 멀리서 소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끝과 끝에서 서로 소리를 지르며 대화를 주고받는 방식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그 옆자리에 앉아야 했기에. "야~ 선우!!" 같은 방식으로 누군가가 날 불렀다. 화장실에 갔다 온 사이 미리 도착해있던 시준이가 정 중앙에 위치한 책상에 앉아 날 큰 소리로 불렀다. 덕분에 가만히만 서 있던 나는 반 애들에게 주목을 받고 말았다. "이리로 와. 야, 쟤가 이선우야." 시준이의 옆에는 다른 남자애들 무리가 몇몇 있었다. 어차피 다 아는 애들이라 굳이 소개는 안 해줘도 되는데.. "와~ 얼마 만이냐 너네들." "방학 때 한 번 보자니까 왜 연락이 없어. 여친이라도 생겼냐?" 하는 얘기들이 전부 그런 쪽이다. 하긴, 나이 감안하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아니.. 근데 너네 뭐 알바한다고 하지 않았어?" 2학년 종업식 때, 다 같이 알바를 구하기 위해 고생 좀 같이 해왔던 애들 중 일부다. 결국엔 각자 일을 구했는데, 나는 지원했던 가게가 폐업을 해버려서 나 혼자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직 담임 선생님도 안 들어오셨겠다. 나는 편하게 시준이의 책상에 한 손을 짚은 채로 친구들과 최근 이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시간이 어느새 10시, 11시가 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마음 놓고 서로 하고 싶었던 말들을 풀며 시간을 보냈다. 3학년의 과목은 총 8개. 중복 시간표가 많아 이전보다는 훨씬 적어졌다. "수학은 수행평가가 70프로, 지필고사가 30프로..." 수학 시간 오리엔테이션을 들으며 주변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한숨과 함께 나도 같이 한숨을 쉬었다. 겨우 이해하고 적응해도, 곧바로 선을 넘어버리는 난이도의 문제가 나와버리는 악몽의 수학. 게다가 이번에는 수능까지 있어 절대 대충 건너뛰면 안 되는 과목이다. 칠판에 있는 긴 일정들을 노트에 기록하는데 손이 떨리는 건 왜일까, 그만큼 나는 수학에 반대적이다. 싫다. 수학만은... '똑똑똑' "들어오세요~." 한창 좌절할 타이밍에, 밖에서 누가 교실 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드르르르륵' 문이 열리고, 나와 모두가 그 방향으로 시선이 집중됐다. 한 남학생이었는데 표정이 엄청나게 진지해 보였다. "무슨 일이니?" 이유는 뻔하다. 분필이 모자라서 빌려달라거나, 선생님한테 개인적인 소식을 전하려거나, 둘 중 하나겠지. 지루한 수학 시간에 타이밍 좋게 잘 나타나 줘서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이선우 학생 좀 볼 수 있을까요?" 어? "그래. 선우야 앞에 나가봐라~." 나를? 왜? "아 잠깐, 지금 오티중인데, 혹시 오래 걸리니?" "아뇨, 잠깐이면 돼요." 잠깐이면 된다라, 차라리 오티 시간인데 오래 걸려도 괜찮은데. .....오티? 오리엔테이션? 설마.... 그리고 저 애, 김민준 아니야? "선우야 빨리 나가봐라~." 중요한 걸 놓쳐버렸다. 입학식이 끝나고 갔어야 했던 곳이 있었다. 잊고 있었네..? 몸이 조금 굳어버린 나는, 20명의 눈빛을 받으며 교실 앞문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작가의 말

이런 뻔뻔한 고교일상에 이어 새로 연재할 소설입니다. 이번 역시 장편 예정입니다. 잘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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